영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대학 다닐 때 영문학 자체를 이해 못했어요. 문학이 담은 메세지와 상징을 이해하기 보단, 스토리 위주로 들여다 봤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인간의 내외면적이 밑바닥을 보여주거나, 어둡고 불행한 스토리로 전개되어서 책장을 넘기는 그 자체가 싫었던 것 같아요. 가뜩이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힘들어 주겠는데 우울한 문학마저 접하는 것을 꺼려했죠. 왠만해선 남탓을 안하고 싶은데, 영문학을 대학에서 어떻게 접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음을 탓하고 싶어요. 그런데,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대학 시절에 접한 문학을 다시 만나고 그 문학이 담은 메세지와 상징, 철학, 그리고 교훈 등을 인지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의나, 해설서 등을 통해서 문학을 마주하니, 문학이 너무나 재미있고 이젠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접했으면.. 암튼) 많은 문학 중에,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위대한 개츠비』글로 전개되는 개츠비의 이야기가 사실 이해되지 않아서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먼저 관람해서 스토리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시중에 다양하게 번역된 『위대한 개츠비』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데, 원문과 번역서를 번갈아보면서,『위대한 개츠비』를 더 가까이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소설가 최민석이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의 삶의 여정과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피츠제럴드의 삶이 『위대한 개츠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 피츠제럴드X최민석 내용
이 책은 소설『위대한 개츠비』에만 국한된 내용을 담지 않고, 저자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가 최민석이 피츠제럴드가 태어나 자란 곳, 다니던 학교, 그가 머물렀던 지역과 호텔, 카페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잠든 곳을 들리면서 피츠제럴드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피츠제럴드의 입장이 되어봅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계급사회, 상류사회를 통해서 받은 상처와 열등감, 혹은 화려한 상류사회를 향한 동경이 그가 써왔던 무수한 작품들 속에 베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소설가 최민석이 피츠제럴드의 발자취를 따라, 피츠제럴드가 머물렀던 호텔과 지역 등을 사진으로 들여다 볼 수 있고, 피츠제럴드의 첫 사랑, 그의 아내와 딸,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피츠제럴드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 어떻게 묘사되는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느낀 점
21세기 현대 미국 대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미국에서 매해 30만권 이상 팔리고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꼽은 "영어로 쓴 위대한 20세기 소설" 중 2위를 차지한 소설『위대한 개츠비』(p. 47). 1920년, 스콧 F. 피츠제럴드는 첫 장편소설『낙원의 이편』으로 단시간에 인기 작가로 거듭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다가, 5년 후, 1925년 두 번째 장편소설『위대한 개츠비』를 출간하지만, 첫 데뷔작에 비해 큰 인기를 끌지 못합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그가 죽은지 10년이 되어서야,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스콧 F. 피츠제럴드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작가 중에 한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소설가 최민석이 피츠제럴드 생과 작품에 관한 모든 자료와, 피츠제럴드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머물렀던 곳과 마주하며 간접적으로 그가 되어보는 글의 전개로, 그의 삶이 열등감과 우월감에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콧 F. 피츠제럴드는 가구 사업가 아버지와 부유한 이민자의 딸 사이에서, 1896년에 태어났습니다. 피츠제럴드는 살아 생전에,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참 강했는데, 그 영향은 이민자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를 무리해서라도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냈으나, 그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상류사회로부터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낍니다. 열등감이 극에 달하기 시작한 계기는, 시카고 부호의 딸 지네브라 킹으로부터 실연을 당하는데, 이유는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첫 사랑으로부터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앨라배마주 대법원 판사의 딸 젤다로부터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또 실연을 당합니다. 그러나, 상류사회로부터 경험한 상대적 박탈감을 토대로 쓴 그의 첫 장편소설 『낙원의 이편』이 대히트를 치면서, 그는 젤다에게 다시 청혼을 하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데뷔작의 성공으로, 그는 지난 시간의 서러움을 해소라도 하듯, 아내와 함께 상류층 사교계에 몸을 담으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깁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은 그의 상류층의 삶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내 젤다가 조현병 등에 시다리고, 그 또한 술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삶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갑니다. 한 때 누렸던 화려했던 삶을 포기하지 못했던 스콧 F. 피츠제럴드. 1920년대 유흥, 향락, 사치와 쾌락에 사로잡힌 소비지향적인 시대로, 그는 늘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었고, 그의 삶이 있는 그대로 투영된『위대한 개츠비』를 출간합니다. 소설가 최민석이 언급한대로, 『위대한 개츠비』는 자전적 소설입니다. 개츠비가 저자 자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단순히, 첫 사랑을 되찾고 싶어서 금의환향한 개츠비의 순애보와 비극을 담은 소설이라고 하기엔 이릅니다. 돈이 최고였던 시대, 물론 지금과 전혀 다를바 없는 시대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존재한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과 허무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로 사람을 평가하던 시대, 상류사회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부와 명예를 얻었으나, 어느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인생이 덧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그가 죽은지 10년 후에 재조명 된 것은,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미리 경험했던, 물질만능 계급사회로 인한 열패감에 시달린 사람들이 많아져서가 아닐까요?
솔직히, 피츠제럴드 삶을 들여다 보면서 답답했습니다. 자신의 분수와 처지를 빨리 인정하고, 자신과 같은 예술적인 감각이 강했던 아내 젤다의 능력도 인정하면서, 자신의 형편에 맞는 삶을 왜 살지 못했냐며, 그를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다운 삶을 살기를 거부했고, 첫 데뷔작 만큼 명성을 얻을 만한 작품을 쓰려고 애를 썼고, 상류사회로 다시 넘어가기 위해서,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거슬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지금과 같이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대가 아니라, 눈으로 보여지는 부와 명예로 사람을 판단하는 시대였기에, 그는 상류사회에 처절하게 집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죽음의 끝자락에서, 물질을 쫓는 인생이 그만큼 허무하다는 것을 직감했을 겁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듯 하고요.) 그래서『위대한 개츠비』속 비극은, 부와 명예를 아무리 쫓아도 결국엔 허무하게 끝날 인생을 미리 예견한 듯 그려내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가 최고였던 시대,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시대입니다. 가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가 자리잡고 있어서, 노력해도 상류사회가 누리는 것 만큼 누릴 수 없는 시대입니다. 돈없으면 노력 조차도 배신하는 시대. 성공이 기회는 상류층에게만 주어지는 시대.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위대한 개츠비』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책글귀
p. 17 작가들은 대게 떠돌이다. 작가가 되기 전에 이미 모국의 곳곳을 다니며, 견문을 쌓고 경험의 지경으 넓히고 생각의 폭을 넓힌다(중략). 그러다 조면 본 것이 많아지고, 경험한 것도 많아지니 뭐라도 쓰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들은 대게 하고픈 말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기보다는, 경험한 것을 모두 말하고픈 족속이다. 일단 타자기 앞에 앉아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순간,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받은 영감, 그 영감이 빚어낸 상상, 그리고 그 경험과 상상이 어우러져 창조한 새로운 무언가가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p. 55-58아이로니컬한 것은 작가의 고통이 커질수록, 결과물은 더 빛난다는 것이다. 작가가 쓰지 못해 방황하는 것은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패를 경험한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쓰고자 하는 작품의 기준은 높아져, 쓰는 행위는 고통스러워지지만, 피같이 토해낸 작품은 미완성일지라도 '가장 성숙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p. 107 전업 작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글을 써야 한다. 취재지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생산성 없는 경험을 했다 해서, '바깥 공기 한번 성큼 했다'는 식으로는 쓸 수 없는 노릇이다. 피츠제럴드는 아내가 정신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더 이상 책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무명 시나리오 작가로 지낼 때에도, 계속 소설을 썼다. 빚더미에 앉았을 때에도, 계단을 오르내리기 벅찰 만큼 건강이 악화됐을 때에도, 죽기 며칠 전까지도 희망을 품고 재기작 원고를 썼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써야 했던 작가였다.
p. 150 그나저나 작가는 어떤 존재인가. 자신의 콤플렉스마저도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존재 아닌가. 피츠제럴드는 개츠비를 자기 대신 참전 시켜 무공 훈장을 받게 했다. 그리고 개츠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으로 설정했다.
p. 153 (중략) 피츠제럴드가 받은 상처의 대부분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유년기에는 곱상한 외모 때문에 세인트폴의 고약한 소년들에게 시달렸고, 청소년기에는 뉴저지의 명문 카톨릭 기숙학교 뉴먼에서 상류층 자제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겪으며 지내야 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지네브라 킹의 아버지에게 거절당했다. 부자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태생적 결정 요인에 의해 상처를 주고받는 미국 사회에 대해 그는 어찌 느꼈을까. 그리고 자신들만의 공고한 벽을 쌓아둔 미국의 지배 계층, 그 중에서도 부자들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p. 201 『위대한 개츠비』야말로 원문으로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많은 역자들의 노력으로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그들의 노력과 성취와는 별개로 그 어떤 번역본도 이 아름다운 영어 문장을 완전히 옮기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밤은 부드러워』나 『낙원의 이편』과 달리,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은 심플하고, 정제돼 있다. 비록, 초반본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p. 287 시대와 전체적인 사회를 읽고 나면, 『위대한 개츠비』는 결코 단순한 소설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아메리칸드림이 빚어낸 다분히 미국적인 욕망에 젖어, 사랑마저도 물질로 회복하고자 했던 한 인물의 실패담이다. 동시에, 그 시대가 겪은 사회적 병폐 현상들(향락, 소비주의, 허영)을 병풍처럼 펼쳐놓고 진행되는 사회적 거울이다.
p. 289 그럼에도, 내가 '개츠비'의 실패를 인정하는 이유가 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슬플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가가 높은 성공의 탑을 쌓아 올린다 해도, 그 탑은 금세 무너질 수 있다. 당대 사람들의 비난에 의해, 독자의 외면에 의해, 시장의 외면에 의해, 혹은 스스로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저지른 실수에 의해, 비단 금전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작가라도, 이미 받은 찬사를 유지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려 할수록 작가는 불행해진다. 성공한 작가가 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그 성공한 작가가 행복하게 자족하며 지내기는 스스로 하늘에 별을 만들어 걸어놓는 것만큼이나 어렵다.성공을 맛본 작가는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싸운다.
p. 289-290 살다보면 어려 경험이 축적되고, 그 경험들이 예상치 못한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평소의 나라면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낼 때가 있다. 작가의 전성기란 바로 이런 걸 써내는 때다. 이때, 신은 잠시 자신의 능력을 인간에게 빌려준다. 그리고 이 능력을 빌려 받은 평범한 인간을 평생 과거의 자신과 싸운다. 그 평범하지 않았던 때의 나를 회복하거나, 그때를 뛰어넘는 비범성을 위해 평생 끝없는 싸움을 나 자신에게 거는 것이다.
본 포스팅은 서평단 참여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